현대해상 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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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 결성에 이르기까지
1983년 10월 17일 우리회사는 당시 라이프 그룹에서 현대그룹으로 넘어가면서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된다.
회사의 사주가 바뀌면 항상적으로 따르는 현상이기는 하지만 당시 우리 회사 직원들은 미래를 확신할 수 없는 가운데 불안한 나날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임원 및 부장 등 몇 분이 사직하는 것을 보았고 그 이후로도 여러 가지 이유로 떠나는 직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그해 대졸 공채 입사자들이 그 전과는 달리 38명씩이나 되었다(그 전에는 6∼7명 정도였다).
많은 수이다 보니 당시 사규개정의 부당성을 문제삼으면서부터 단결된 힘이 보다 강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당시의 사규에는 입사 후 3개월이 경과하면 상여금을 전액 지급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1983년 3월경) 상여금 지급규정이 입사 6개월 이후 1년 미만인 경우에는 50%, 1년이 경과한 후에는 100%를 지급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이 규정의 적용을 받게 된 당시 공채 입사자들 38명은 급히 동기회 모임을 갖고 문제점을 토의하였다.
그 결과 사규 개정의 부당성 및 상여금 감액지급(당시 3, 6, 9, 12월에 연간 500% 지급키로 되어 있었으나, 사규개정으로 200%밖에 수령하지 못할 상황이었음)에 대한 불합리를 시정하기 위해 대표를 선정, 당시 전무이사에게 항의하기로 결정한 후 시정이 안될 경우 단체로 사표를 제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한 노력의 대가로 사규는 다시 개정되었는 바, 그 내용은 약간 완화된 것으로 입사 3개월 이후 6개월 미만인 경우에는 지급액의 50%, 6개월이 경과하면 100% 지급키로 되었다.
그것으로 일단 사건은 마무리되었으나 그것이 노동조합 결성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 사건을 통해 귀중한 교훈을 얻게 된 것이다.
사용자의 부당한 처우에 대하여 직원 개개인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으나, 우리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을 통해서는 개선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이후, 우연한 기회에 3명의 입사 동기생들이 의기투합하는 기회를 가지게 됨으로써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현대그룹 내에서의 노동조합 결성의 싹이 움트기 시작하게 된다.
1984년 10월 중순 경, 당시 총무부 인사과에 근무하고 있던 김형철을 중심으로 홍순계, 곽태원 등 3명의 입사 동기생이 우연히 만나 노동조합의 필요성에 관해 토론을 하였고, 그 시점부터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준비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직장의 안정성의 추구와 직장의 민주화 실현이라는 목표를 설정한 후 조합 결성에 필요한 법적 요건과 현실적 여건을 나름대로 면밀히 분석하고, 우선 가장 시급한 인원 확보를 위한 활동을 개시했다.
노동조합법상 30명 이상의 발기인이 필요하였는데 당시의 상황으로는 30명이라는 인원확보는 무척이나 힘든 실정이었다.
현대그룹에서는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해고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조합결성에 적극적으로 선뜻 나서는 동료사원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38명의 동기생들을 중심으로 은밀하게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설득하며 동지를 규합하는 노력을 해 보았으나 일은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필요성은 공감하면서도 앞에 나서기가 어렵다는 이유와 현대그룹에서는 노동조합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고정관념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개월 여에 걸친 꾸준한 노력으로 약 40여명의 가능한 인원을 확보하게 되었다.
확고한 의식을 가지고 노동조합에 참여하고자 하는 인원은 7∼8명에 불과했으나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결성대회에 참여하겠다고 확답한 인원은 약 20명 가까이 되었다.

그러던 중에 1985년 새해 아침이 밝았다. 우리 추진위원 4명(1명이 추가로 추진위원으로 확보되었음)은 1월 초순 경부터 본격적인 결성준비 활동에 돌입했다.
그해 2월 12일은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었다. 우리는 정치적인 상황도 최대한 이용하자는 의견을 모아 D - DAY를 1월 30일로 결정하고 결성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확실한 인원점검에 전력했다.
그러나 대회 전날까지 확고부동한 답변을 한 인원은 20여명에 불과했다.
드디어 조합 결성 당일의 전국금융노동조합연맹 회의실, 오후 7시에 시작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결성대회는 인원미달로 8시 30분에야 시작할 수 있었다.
1시간 30분이 마치 몇 년이나 되는 것 같은 지루한 시간이었다. 시작 당시 참가인원은 28명이었으나 잠시 후 8시 40분, 추가로 확보된 추진위원인 최광일 동지(초대 회계 감사)가 같은 부서에 근무하는 후배, 동기생 5명을 데리고 참여함으로써 33명의 발기인으로 결성대회를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나중에 회사에서 노동조합 가입대상자 자격문제를 들고 나와 억지를 쓰는 책동에 대비하여 나는 조합에 일단 가입하지 않았다.
이 대회에서 위원장에 곽태원, 부위원장에 홍순계, 회계감사에 최광일을 선출하였다.
실로 어렵고도 힘들었던 조합의 출범이었다.
- 2대 위원장 김 형철의 "척박한 땅 현대에 노동조합의 씨를 뿌려" 中
(녹진 글방2 화이트칼라 노동조합론) -